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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 연세대학교 캠퍼스 복음화와 연세대학교의 사명

 

 

 처음 캠퍼스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해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한가지 꿈은 다름아닌 '캠퍼스 복음화'였다. 진정으로 이 공동체가 미션스쿨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놓일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 꿈을 마음에 품은 지가 6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 사이에 많은 고민과 연구들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순진했던 부분들이 많이 벗겨졌고 현실적인 문제들과 상황들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캠퍼스 복음화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특별히 연세대에 대해서 언더우드에 관련된 서적과 논문, '조선기독교대학'이라 이름 지어졌던 연세대학교에 대한 자료들을 찾으면서 놀랐던 것은 처음 나와 비슷한 나이에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온 언더우드가 이 대학을 세울 당시에 꿈꾸었던 꿈 또한 내가 꿈꾸던 캠퍼스 복음화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이 학교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갖춘 크리스천 리더들이 양성되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번 기독교윤리학 레포트에서는 이러한 캠퍼스 복음화와 연세대학교의 사명을 이번 학기 동안 배운 기독교윤리학, 특별히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론과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보여준 방법론을 토대로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보려고 한다.

 

1. 캠퍼스 복음화의 방향성 : 기독교 학교

 

 캠퍼스 복음화라는 주제는 사실 보수적인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공통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비전 내지는 구호이다. 많은 단체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 캠퍼스 위에!'라는 주제 아래에서 신입생 전도, 제자훈련, 소그룹 운동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기독교연합(기연)운동 또한 그 맥락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장하는 캠퍼스 복음화는 생각보다 그 내용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기존의 캠퍼스 복음화라는 것은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복음화시키자'라고 주장할 때의 맥락을 차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맥락에서의 복음화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는가에 달려 있고, 캠퍼스의 많은 이들이 전도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것을 캠퍼스 복음화의 목표로 삼게 되기 쉽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각 단체들의 활동 방향성 또한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전도하고 이들을 양육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데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이를 한 개인의 회심에 비추어서 생각해본다면 기존의 캠퍼스 복음화가 지향하고 있는 바는 한 개인이 '교회에 출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에 가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기본이자 첫걸음이며, 교회에서 나머지 신앙의 성숙을 도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한 개인에 대한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면 이 개인이 교회에 출석한 이후, 하나님 안에서 신앙인으로 자라나가는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성경 속의 성경적 회심과 성화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거하고, 하나님과 개인이 연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를 캠퍼스에 적용시켜 보자면, 진정한 의미의 캠퍼스 복음화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캠퍼스 내에서 전도되어 교회생활에 적응하느냐가 아니라, 이 대학공동체가 어떠한 방향성을 지향하며 대학공동체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측정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필연적으로 회심한 지체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연세대의 영적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는 마치 '세상에서 성공한 선데이 크리스천'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연세대는 미션스쿨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세상적인 성공까지 이뤄낸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내에 기독교과목과 채플, 주일예배를 할 수 있는 교회가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세상적인 방법으로 학생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적 형식은 계속해서 고수하지만 기독교적 가치가 대학 내의 문화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하고 괴리되어 있는 상태가 마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지만 그 신앙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까지는 하지 못하는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위상은 높을지 모르지만 정작 복음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우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현재의 특별한 상태는 속칭 '88만원 세대'라고 불릴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청년 세대가 처한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이 전무하다는 상태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거의 물어지지 않는다. 이 또한 삶과 괴리된 복음 전도를 통한 양적 확장에만 몰두했던 우리의 책임이 있지는 않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2.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 있어서 연세대학교의 가능성 : '인간의 본성과 운명' '그리스도와 문화'에 비추어서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캠퍼스 복음화와 회복된 학문공동체로서의 연세대의 청사진은 무엇일까. 이는 라인홀드 니버와 리처드 니버가 제시한 사례들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라인홀드 니버가 1939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영국의 에딘버러에서 행한 기포드 강연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강연을 할 당시, 근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낙관주의' 2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큰 혼란 가운데에 빠져 있었다. 과학의 발전과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와 계속해서 사회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근대의 역사관은 세계대전에서 나타난 기술발전의 역기능과 인간의 악마성, 사회의 퇴화 등에 의해서 모두 부정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기존의 가치관이 부정당하는 현실 앞에서 일종의 '아노미적 상태'에 처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 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가치관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관과 역사관에 대한 논의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믿음체계, '신조' '교리'로부터 이끌어내어 설명해내고 있었다. 기존의 근대적 인간관과 역사관이 어떠한 면에 있어서 한계와 모순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차근차근히 설명한 후,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인간관과 역사관을 설득력있게 논증해내면서 2차 세계대전 직후 사람들이 겪고 있던 아노미적 상태에 대한 일종의 대안책을 제시해주었다. 정치철학적 측면에 있어서 신학의 전제들을 통해 무너진 근대의 세계관을 새로운 것으로 재건해낸 덕분에 사람들은 성경적 맥락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나아가야 할 방향들을 어느 정도 재설정할 수 있었다.

 

 이는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나타나는 '문화변혁자 그리스도'의 유형과 맞닿아 있다. 문화변혁자 그리스도는 결국 죄의 왜곡으로 인해 죄에 물든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복'시켜서 그 원형을 복구시키는 역할로서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라인홀드 니버의 경우, 니버는 죄의 왜곡으로 인해 근대적 인간관이 박살나고 그 헛됨이 폭로되었던 때에 '회복된 원형으로서의 인간관과 역사관'를 이들에게 제시하여 이들로 원형을 회복시키고 복구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는 리처드 니버의 유형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도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저에는 기독교가 믿는 "예수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신 하나님'이 다름 아닌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저 교회 내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주는 이야기꾼도 아니고, 종교적 영역에 국한되어서 행동하시는 분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렇기에 우리의 정체성은 교회 안에서만 머무를 수 없고, 우리는 죄된 세상 속에서 그 죄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고 증거하는 역할로 부름 받았다.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각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디 창조목적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지금 영역이 얼마나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를 보고 이로부터 돌이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인류는 미로를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다. 인류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 눈 앞에 있는 길 중에서 어떠한 길을 선택해야 하느냐이고,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계속되는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과 감각을 축적해나가고 이를 통해 한걸음씩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 역사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비유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인이란 존재는 '미로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눈 앞에 있는 길에 대한 직관적 선택을 넘어서서 지도를 보는 훈련을 통해 우리가 미로의 어느 위치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키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지도를 가졌다는 감격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지도를 볼 줄 아는 안목과 훈련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알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들고 있는 것이 지도임을 설득하고 그 지도에 따라 역사를 제대로 된 길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화' '선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속칭 '예언자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의 뜻을 대언했듯이 각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영역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고 또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성경적 관점에서 풀어서 제시해야 할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영역들을 실제로 '개혁'할 수 있는가 와는 독립적인 사안이다. 개혁할 수 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설령 개혁할 수 없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성을 선포하고 잘못된 방향성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이 주어진 셈이다.

 

 

 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각 영역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개개인의 삶에서의 묵상과 성찰로 획득되는 것을 넘어서서 각 영역의 학문적 이론에 있어서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사고와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리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는 신학과 개별 학문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상호피드백이 요구된다. 이를 통해 신학은 세상과 괴리되지 않은 컨텍스트 속에서 올바른 텍스트를 구현해낼 수 있고, 개별 학문들은 지속적인 신학적 검토와 비평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과 방향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세속적 학문풍토에 대한 예언자적 역할을 지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위의 비유를 다시 인용하자면, 지도를 읽는 눈과 주위를 살피는 눈이 동시에 발달되면서 지도와 현장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 신학과와 개별학문들이 동시에 발달되어 있는 '기독교 대학'이 필요한데, 그러한 대학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학교는 '연세대학교'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순히 연세대의 캠퍼스 복음화는 연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위해 연세대가 감당해야 할 부르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정치철학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그 정치철학을 기초로 사회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러한 가치관이 하나의 특정한 정책개발의 흐름을 일으킬 수 있고,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내면화한 정치공동체를 구현해낼 수 있다. 이는 정치영역에 있어서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정치공동체의 형성과 이들이 정치영역에서 감당할 면역체계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기독교적 학문연구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이에 상응하는 특정 영역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는 사례가 다름아닌 좋은교사운동이다. 교육영역에서 교사 신우회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좋은교사운동은 기독교사들의 신우회로서만이 아니라 교육정책, 교사들의 교육철학 면에 있어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현재 교육계에서는 진보 성향의 전교조와 보수 성향의 교총과는 별개의 제3의 세력으로서 좋은교사운동이 사회에서 일정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운동이 학문영역까지 확장되어서 신학과 교육학이 상호작용하는 기독교적 교육학이 연구되게 된다면 이 운동에 있어서 이론적 지원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연세대가 학문영역에 있어서 신학과와 타과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기독교적 학문의 연구 진행, 그리고 단순한 학문영역에 있어서의 예언자적 역할을 넘어서서 그러한 학풍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사고하는 '지식인'을 길러내는 전당으로서 기능하게 된다면, 무신론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진행되는 사회 한가운데에서 '대안시민사회'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시민사회가 기존의 교회들과의 연계를 통해 곧 '예언자적 시민사회'로서 각 영역의 면역체계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것이 '복음화된 캠퍼스'로서 사회 가운데 감당해야 하는 연세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3. 연세대학교가 '복음화'되기 위해 감당해야 할 역할들.

 

그렇다면 연세대학교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할까. 위의 지도비유를 계속해서 사용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는 우리는 지도를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만일 연세대에서 진행되는 기독교적 학문이 제대로 된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연세대는 도리어 학문 영역에 있어서 소외를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발상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이유 또한 이러한 이유가 크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신학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윤리학 정립. 그리고 이에 입각하여 진행하는 학문별 관점 확립이 섬세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지도가 옳은 지도라는 사실을 사람들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득시켜야 한다. 이는 곧 각 학과 내에서의 학문적 헤게모니 싸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개인이 회심한 이후에도 죄와의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듯이, 이미 어느정도 세속화가 진행된 연세대 내에서 기독교적 학문이 각 학과의 헤게모니를 쥐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각 학과의 지배적 헤게모니를 쥐지 못하더라도 특정 교수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과별 '기독학회'형성 등을 통해 하나의 온전한 기독교적 학문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유지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논문발표와 같은 학문영역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기독교적 학문의 정당성을 학계에서 입증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저 지도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통해 실제로 출구를 찾는 '실천'이 일어나야 한다. 기독교적 학문이 상아탑에 갇힌 채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학문적 성과가 각 졸업생들을 통해 삶으로 구현되어야 하고 하나의 '대안시민사회'를 구축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독교적 학문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각 학생의 삶과 학생사회의 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도 기독교적 성찰과 회심의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수들의 학문 영역에서만이 아닌 학생들 안에서도 '기독교적 문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유용할 수 있는 것이 현재 왕성하게 횔동중인 과기도모임들이다. 학과적 특성과 기독교적 특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과기도모임들이 기독교적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장으로서 '기독학회'로 발전될 수 있다면 기독교적 학문연구가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기독교적 문화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청년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과 움직임도 필요하다. 그저 대학의 역할과 개별 학문이 처한 현실만이 아니라 대학생들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성찰과 대안 제시가 이루어질 때, 틀에 갇혀서 제한적으로 진행되는 운동이 아닌 틀 자체를 성찰하고 예언자적으로 비판하는 온전한 의미의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청년세대로 하여금 기독교적 학문과 성찰에 대한 옹호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개인적으로 삶에 있어서 큰 충격을 주었던 두가지 사건은 13년에 있었던 사랑의교회 건축문제와 14년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였다. 사랑의교회 건축문제는 3000억원이라는 거금으로 지어 올린 초호화예배당에 대해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교인들에 대한 절망감이 컸고, 세월호 참사는 참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온갖 비리와 부패, 돈과 안전성을 거래한 대가를 무고한 어린 아이들이 치루어야 했던 상황들에 대한 절망감이 있었다.

 

 독립적이게 보일 수 있는 사랑의교회 건축문제와 세월호 참사를 잇는 연결고리는 다름아닌 '윤리'라는 고리였다. 사랑의교회 건축문제는 사회를 성경적으로 진단하고 분별하는 작업을 게을리한 결과 교회 내의 사안조차도 분별할만한 능력을 잃어버린 상황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교회가 감당해야 했던 사회의 부패에 대한 예언자적 외침이 사라지면서 윤리의 부재가 누적되어 초래하게 된 대참사였던 것이다. 마치 심장과 피부 사이의 혈관이 끊어져버려서 피부는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괴사되어버리고, 심장은 피를 흘려보내지 못해 그 안에서 피가 고여 썩어버려 심장과 피부가 모두 죽게 되는 상황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에 있어서 심장과 피부를 연결할 수 있는 '혈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다름아닌 '연세대학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세대학교가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에 있어서 브레인의 역할을 감당해줄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세월호와 같은 비윤리적 참사를 야기하는 구조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를 할 수 있고, 동시에 사랑의교회 건축문제와 같은 교계 문제에 대한 분별력을 제공하여 더 거룩한 공동체로 각 교회들이 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혈관을 통해 심장과 피부가 모두 소성되는 역사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소망함을 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세대학교의 캠퍼스 복음화는 연세대 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한국사회를 위해서도 연세대가 감당해야 할 부르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부르심이야말로 언더우드가 처음 '조선기독교대학'을 세우면서 품었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을 길러내는 학교로서 본연의 설립이념에 충실한 캠퍼스가 되는 것이 아닐까.

 

 

 연세대가 그러한 혈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내세적 종교를 넘어서서 '예언자적 시민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베이스캠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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