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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3부 리더들에게.

얘들아 안녕. 차마 리더방에는 올릴 자신이 없는데, 이렇게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거 같아서 이렇게 글을 남겨.
알다시피 내가 용기가 없다. 근데 너무 황망한 마음이 커서, 이렇게라도 적어.
교육간사로서가 아니라 내 개인적 사견이니 그러려니 하렴.
하지만 내 신앙적 고백에 근거한 글임을 기억해줬음 좋겠어.

너희도 들었겠지만 어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미국은 아주 난리가 났고, 그 여파는 한국도 마찬가지일거야.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백인 복음주의자의 81%가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경악한 몇몇 리더는 나에게 직접 연락이 오기도 했어.
그런데 얘들아. 내가 정말 솔직하게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같은 상황에서 트럼프가 나왔더라도 한국교회는 트럼프를 지지했을거라 생각해.
그리고 여기서 지칭하는 그 '한국교회'는 어떤 부패한 목회자 몇몇이 아니라, 너희가 지금 맡고 있는 너희 조원들과 우리 자신. 매주 만나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 사람들로 이루어질거야.

어떤 분은 그렇게 해석하시더라. 미국 복음주의의 선택은 오바마 정부 시절에 합법화된 동성결혼과 임신 중절 금지를 위해서 힐러리가 아니라 트럼프에 투표한 것이라고 말이야.
이게 뜻하는게 뭐냐면, 뭐가 복음적인거고 뭐가 아닌건지가 구분이 안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뜻이거든. 동성결혼과 임신중절은 보이는데, 여성혐오와 소수자 혐오, 이민자 혐오는 안보이는 거니까.
물론 많은 다른 이유가 있을거고, 복합적인 지지배경이 있겠지만, 이 상황을 보면서 나는 저 일이 아마 복음주의의 '무식함'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생각을 했어. 영적 무식함 말이야.

난 사실 저 사건을 보면서 우리 교회 문제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어. 문제의 찬반여부가 아니라, 문제에 대해서 말씀 앞에서 함께 씨름하지 못하고, 아니 씨름하지 않았던 우리의 죄를 말이야.
2013년의 그 때에도 비슷했거든. 문제가 터졌고 문제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어. 근데 그때도 우리는 문제를 붙들고 '함께' 씨름하기보다, 시스템을 운영하기에 바빴던거 같아.
아니 사실 어쩌면, 우리는 설교나 큐티설명문을 통해서 좋은 말씀을 '받아먹기'에 익숙했고, '소비'하기에 익숙했지 그것을 나의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너무나도 미숙했기에 그랬던 것일지도 몰라.
그럼에도 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형누나들이 있었고, 그때의 리더게시판이 정말 뜨거웠던 기억이 나. 다만 그 뜨거움이 어떠한 행동이나 회개로 연결되지 못했음이 스스로나 우리에게 아쉬웠지.

그런데 그때를 되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나 스스로에 대해서 속상하고 힘들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 그건 다른게 아니라, 그 문제 앞에서 '성경적'인 방향성이 무엇인지 도무지 방향감각이 생기지를 않더라는거야. 이게 이념적인 분노인건지 사랑에 근거한 애통인건지 구분이 안되었고, 공동체가 갈갈이 쪼개져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를 수습하고 회복할 수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때야 조금 깨달았던 거 같아. 아, 내가 진짜 '무식'하구나. 내가 신앙생활한다고 우쭐댔는데 진짜 공동체 문제 하나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하구나. 우리가 참, 무식하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미친듯이 책을 읽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었던 거 같아. 도대체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난건지. 나는 여기서 왜 분노가 생기고, 그 분노의 근원이 무엇인지. 교회가 도대체 무엇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인 교회의 모습에 비해 우리 교회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건지. 우리는 얼마나 멀어져 있는건지. 알고 싶어서 미친듯이 뒤지면서 읽고 고민하고 씨름했던거 같아. 그 과정에서 때론 전율하기도 하고, 때로는 막다른 골목 앞에서 몇일동안 끙끙대기도 하고, 기도실 가서 울기도 하고. 그렇게 아주 희미하게나마, 성경적 방향에 대한 감각이 생겼던 거 같아.

그러고 다시 고을지기로, 교육간사로 공동체에 돌아왔어. 왜 계속 사랑의교회 다니냐는 이야기 정말이지 수도없이 들었는데. 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봤어. 여전히 이렇게 모이고, 이렇게 헌신하고, 이렇게 하나님 바라보는 아이들 만나는거 쉽지 않다 생각했어. 우리가 설령 무식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몰라서 무식한거지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이들이라는 확신이 내겐 있었어.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봤어. 말씀으로 변화되는 친구들을 봤거든. 그 말씀에 사로잡히는 아이들을 봤거든. 

근데 얘들아. 먼저는 너무너무 미안해. 너희가 어떤 희생하면서 여기 오는지 사실 너무도 잘 알아. 토요일 4시간, 일요일 거의 종일. 게다가 한 텀동안 10명내외의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고 훈련시키기로 책임지워진다는 것. 그 부담감.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쉽지 않은 때에 그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또 순간순간마다 그 섬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는 것도 너무도 잘 알아.
그리고 그럼에도 이 엘티가, 너희가 그렇게까지 희생하면서 오는 엘티에서, 너희 충분히 먹을만한 말씀이나 기도를 준비하지 못하는 것이. 개개인의 경건생활만으로는 신앙 유지하면서 살아내기가 너무나도 버거운거 뻔히 아는데, 그래서 엘티가 너희에게 있어서 참 많이 중요한데. 너희에게 '엘티에 오면 너희가 반드시 살 수 있어!'라고 확신있게 이야기할 정도로 밥상을 충분히 차리지 못하는 것이, 내 사역 내내 참 많이 한이 되고 미안하고 또 자괴감이 들더라. 그래서 매텀 끝날 때마다 너희 상황 들으면서 섬김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조금 더 자신있게 권하지를 못했어. 밖에 나가면 신앙이 쉽게 무너질 것이 보이고 그렇게 놓친 친구들 참 많았어서 너무 속이 상하는데, 그렇다고 마냥 리더 섬기는 것이 영적 성장에 있어서 능사가 아닌거 같은데. 너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

근데 얘들아. 진짜 속상했던게 뭔지 알아? 그건 다름이 아니라, 그렇게 엘티에서 영적인 부분이 충분히 채워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있음에도 내게 직접 와서 엘티에 대해 토로하거나 건의하거나 하다못해 화라도 내는 친구가 한명이 없더라. 전해전해서 푸념하거나, 짜증내는 친구들은 봤는데 직접적으로 건의하거나 나서는 친구를 못봤는데, 사실 그게 너무 속상했어. 워낙 리더십을 신뢰하고 순종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이기에 그럴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이미 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많이 접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데. 정말 정말 속상했던 건, 그렇게 한 텀이 지나고 그냥 리더를 섬기지 않겠다고 하고 쉬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어.
 리더 쉰다고 신앙이 무조건 무너지진 않아. 실제로 몇몇 리더는 오히려 쉬는걸 권면해주기도 했고. 그런데 쉬어본 친구들은 알겠지만 대학부 맥락에서 쉬면서 신앙유지하는게 정말 쉽지는 않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경건생활 유지해야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결단해야 되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우리 공동체는 쉬는 리더들에 대한 관심이 잊혀지니까. 이것도 너무 속상한 지점인데, 눈에 보이는 사람들 챙기다보면 정말 손 뻗어 챙기기가 쉽지 않더라. 그런 스스로에게 얼마나 화가 나고 속상했는지 몰라.

근데 동시에 또 한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많은 리더들이 쉰다는 얘기는 엘티가 리더들의 삶의 유지에 있어서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는거 거든. 개개인의 신앙만을 탓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또 너무 멋진 이들이 리더를 쉬는 선택을 한단 말이야. 그러면 엘티를 바꿔야 한다는 건데, 그래야 엘티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는건데. 엘티에 있을 때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개인적 사정을 들면서 리더를 내려놓는 모습을 볼 때 사실 힘이 참 많이 빠졌어.

얘들아 나는 말이야.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덮어놓고 리더십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생각해. 고민할만큼 고민해보고, 하나님 앞에서 이 사건이 어떠한 모습인지 분별할 수 있을때까지 최대한 분별해보고 고민해보고, 그럼에도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 리더십이 '나를 믿고 따라와줘'라고 요청할 때, 리스크가 있음에도 믿고 따라주는 것. 난 그게 순종이라 생각하거든.
다시 말해서, 진짜 순종을 하기 위해서는 나는 충분히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틀리더라도 자기 주장을 하고 화도 내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선택권 자체를 리더십에게 넘기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맹신'이라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 맹신이 무식을 낳는 것이고.
 엘티에 대해 불편함이 느껴졌다면, 주위 사람들이랑 얘기도 해보고, 때로는 나한테 따져도 보고. 따지는 과정에서 논리가 필요할테니까 '그렇다면 이상적인 엘티는 어떤 모습이지?'라고 고민도 해볼 수 있고. 그러면서 교회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성도가 누구인지 스스로 공부해볼 수도 있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치우침이나 과장됨도 깨닫고 고칠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과 의견도 이해해볼 수 있고. 그럼에도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거 아냐. 그리고 그 과정이 있어야 우리 안에서 '엘티는 이래야 해' 하는 하나의 방향성이 좀 생겨나지 않을까?
 기둥이 슈퍼맨이 아니고, 목사님이 슈퍼맨이 아니시기 때문에 엘티에서 너희가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부분이 필요한지 잘 모르거든. 정말 무서울 정도로 잘 모르겠어. 나만 보더라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리더의 입장에 대해서 둔감해져 있는걸 발견하거든. 이런 부분을 보충해주려면 너희가 계속해서 이야기해주고 소리쳐줘야 하거든. 그래야 엘티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거든.

가장 최근의 예로, 우리 오전엘티 연속 3번 했잖아. 그러고 지금 지난주에는 리트릿갔고 이번주에는 새생명축제라고 gbs를 2주 연속 못하잖아. 이런저런 것들을 하느라고 아이들에게 gbs에서 말씀먹일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지고, lbs가 충분히 말씀 볼 시간이 확보가 안되는 것에 대해서 난 사실 걱정이 많이 되었거든. 근데 어느 리더도 나에게 와서 이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걱정하거나 화내는 리더가 없더라. 기둥모임때 말씀 흐름 끊기는 것도 나는 너무 속상하던데, 내가 괜한 노파심으로 잘못 판단을 하는걸까 아니면 gbs에서 말씀 먹이는 것의 무게가 그닥 크지 않은 걸까?

우리가 큐티, 말씀통독, 기도라는 큐말기 말고 평소에 신앙훈련할 수 있는 방법은 해봐야 예배랑 gbs뿐일텐데. 예배는 목사님 말씀을 '듣는' 자리인거고, 결국 내가 직접 고민하고 묵상하는 시간은 gbs뿐이잖아. 거기서 한 텀에 성경 한권씩, 그것도 겨우겨우 교재에 의지해서 진도를 나가잖아. 그러면 설교는 목사님들께 맡긴다 치고 한 조원의 신앙을 결정짓는 중요한 자리가 사실 gbs란 말이야. 그 안에서 신앙적인 분별과 지식과 사랑을 배우는 거고. 디모데전서에서 말하는 그 '가르치는 것'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gbs자리잖아?

 그 gbs에서 말씀 먹이라고 부름받은 이들이 리더잖아. 그러면 나는 그 리더들에게 하나님께서 조원들의 영혼을 '책임지라'고 부르셨다 생각하거든. 물론 개개인의 신앙은 개개인의 책임이자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문제이겠지만, 분명히 우리를 이 조원들의 리더로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신건 맞잖아. 그럼 우리는 책임지고 한 텀동안 이 조원들을 가르치고 먹여야 하는거거든. 내 분량껏 최선을 다해서 말야.

그게 소홀히 되는 순간 조원들은 방치되는 거거든. 스스로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씨름할 기회를 놓치는거고, 그나마 성실한 조원들도 예배에서 목사님 설교 들으면서 신앙 키울텐데. 그러면 신앙적 성장은 있겠지만 자칫 수동적인 교인이 되기 너무나도 쉽잖아. 그러면 몇몇 정치적인 목사님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성경적으로 분별하지 못하고 휩쓸리는 거고. 사실 나는 거기에서 위에 말한 미국 복음주의가 트럼프를 선택한 주요한 배경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

 결국 스스로 신앙적인 고민을 하고 분별을 하고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훈련이 너무나도 필요한데 그런 훈련을 해주는 자리가 사실 gbs의 자리란 말이야. 그리고 이건 결국 인격대 인격의 교제를 기반으로만이 가능한 훈련인 것인데, 목사님이 모든 조원들을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세워진 것이 리더란 말이야. 그 정도로 중요한 자리가 리더란 자리인건데. 물론 리더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공동체에게 gbs의 조원들이 영적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도 할 수 있어야 하거든. 

 gbs에서 충분히 말씀을 붙들고 삶에 대해서 씨름하고, 영혼을 놓고 씨름해야 분별력이 좀 생길거 아냐.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그래서 이렇게 해봤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거 같더라. 그것이 쌓이고 쌓여야 어떤 상황 앞에서 '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기를 원하시겠구나'라는 것에 대한 감이 잡힐거 아냐. 그것들이 개인을 넘어서서 공동체 내에서의 논의로 이어질 때 공동체 전체가 '아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원하시는구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 그 모든 것의 시작이 gbs란 말이야. 근데 gbs가 대학부에서 소홀해지면, 다 무너지는 거거든. 거기에서 트럼프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오는 거거든.

이번에 최순실 게이트 터진 일로 세상이 뒤숭숭하지? 대학부에서도 많은 친구들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더라. 근데 지난 번에 기둥들이랑 나라와 민족을 두고 기도하면서 너무 뼈져리게 후회했던 지점이 뭔지 알아? 지금 대한민국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귄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잖아.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청와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근데 우리는 2013년에 이미 권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었거든. 그 진위나 의견에 상관없이 우린 그런 사건을 먼저 경험했었단 말이야. 누군가는 권위에 대해 실망했고 상처입었고, 공동체는 쪼개졌잖아.
 근데 우리는 어떻게 했어? 권위의 신뢰 붕괴 문제를 두고 말씀 앞에서 씨름하기보다는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서 대학생들이 모이는걸 막았고, 막는다고 그대로 모이지 않고 각자 '기도'하다가 끝났단 말이야. 그 기도조차 기도를 통한 '회개'가 아니라, 각자 개인기도 하고 끝났잖아. 나갈 사람은 나갔고 남을 사람만 남았거든. 그냥 그렇게 다시 잠잠해져서 다시 공동체를 꾸려갔지.

 그랬더니 지금 권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아노미 상태에 빠진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해줄 말이 없는거야. 하나님 앞에서 씨름을 해야 하나님의 뜻도 구할 수 있고 그 뜻대로 살아낼 수도 있는건데, 결국 같은 상황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밖에 나눌게 없는거야. 각자 개인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 기도는 정말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더 말하는 건 입만 아플거야. 하지만, 우리가 세상 가운데 제사장 족속으로 부름받은건 그저 그들 대신해서 중보정도 해주는 정도로 만족하게 부름받은게 아니거든.

그리스도인의 명예가 무엇이라 생각해? 나는 그 명예가 다름아닌, 하나님의 형상 답게 사는 것이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배우고 깨달으면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라 생각하거든. 그래서 세상과 같은 상황 앞에서 세상과 다른 선택을 하고, 이렇게 선택하는게 진짜 인간의 지음받은 대로 선택하는 거다라는 걸 당당하게 알려줄 수 있는 거. 근데 그러려면 우리 안에서 치열하게 우리 안팎의 죄성들을 분별해내고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스스로를 알아야 하거든.

 내가 지겹도록 매번 얘기하듯이, 우리는 미로 속에 갇힌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인도'하라고 부름받은 예수사람들이란 말이야.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신앙의 유산이라는 '지도'를 얻은 사람들이고. 즉,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로의 설계자에게 대신 마음을 전하는 중보기도 이상으로 지도를 읽고 사람들에게 가야할 방향을 알려줘야 한단 말이야. 그게 사무엘상에서 사무엘이 했던 역할이었잖아?

근데 우리가 너무 풍성하게 무식한거야. 지도를 읽는 법을 모르거든. 여기가 지도의 어디쯤인지 읽어내지를 못하는거야. 막다른 골목에서 다들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도를 쥐고 있으면서도 같이 표류하고 있는거야. 아니 어쩌면 지도를 쥐고 있다는 우쭐함에 사로잡혀서 꼴보기 싫은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거지. 그러다보니 막상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주저앉는거야.

지금 이 사회적 혼란 상태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사실상 기도밖에 없어. 그건 우리가 방향타가 되어줘야 함에도 우리가 지난 시간들동안 너무도 게을렀기 때문에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수치스러워해야 해. 목사님이 이따금씩 이야기하시던 '시대적 대안'이라는 말. 우리가 시대의 소망이라는 말. 그 말은 진짜 진실이야. 우리는 시대를 이끌어나가고 본이 될만한 잠재력을, 아니 사실 그렇게 부름받은 이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수치스러워하고 부끄러워 하면서 울어야 한단 말이야. 막다른 골목에서 정작 길잡이가 필요한 이 때에 준비되지 않은 스스로를 바라보며 울어야 한다고. 비느하스의 아내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으며 죽어갔던 것 처럼 말이야.

그 울음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그것이 공동체와 한국교회의 회복의 신호탄이 될거야. 우리의 풍성한 무식함에 대한 울음은, 5년 후 10년 후를 준비할 회개의 동력이 될 수 있을테니까. 지금부터라도 치열하게 말씀과 현실을 붙들고 씨름한다면 우리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방향성, 나아가서 이 세대의 길잡이 역할을 회복할 수 있을테니까. 사무엘상 7장서도 봤잖아. 궤도 빼앗긴 절망 앞에사 사무엘과의 회개가 다시 그들을 회복시켰잖아. 하나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시거든.

근데 봐봐. 오늘 진행되는 기도회조차 목사님들이 만들어서 떠먹여주는 기도회잖아. 또 모이라 할때 모여서 큐시트에 맞춰서 찬양하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그리고 나는 충분히 했다고 자위하며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또다른 방식으로 기도회를 소비하고 끝난다면 아무리 기도회가 은혜로웠더라도 그 은혜가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로 이어질 수는 없어. 다시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발가벗기고 서서 옷을 찢어야 하고, 함께 모여서 죄를 토설하고 공동체적으로 회개할 방법을 찾아야 해. 사무엘이 만들어준 미스바에서의 기도회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울고, 우상을 모두 버린 후에야 일어났음을 절대 잊지마.

이게 너희가 광화문에 나가야 한다거나,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서명운동을 해야한다는 말이 아니야. 그것이 의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회개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참여하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우리는 더 멀리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시대를, 이 공동체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해. 그러려면 성경도 깊이 알아야 하고 시대와 개인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아야 해.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절대 썩어지지 않을 신앙의 유산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쌓아 나가야 해. 모두가 막다른 골목에서 지도자를 원망하는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울음에 동참하는 동시에 지도 읽는 법을 알아야 해. 그래서 다음에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방향을 알아서 인도를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공동체에다가 대고 화라도 좀 내줘라. 이 공동체가 이 방향으로 가면 안된다고 너희 의견을 좀 외치고 해주라. 좀 틀리면 어떠니. 우린 고작 20대인데.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틀림 가운데에서 뭐가 맞는지를 알아갈 거 아냐. 지금 이 풍성하게 무식한 현실에 대해 분노해줘. 함께 모여서 공동체 뒷담이라도 까주고 그걸 기도제목으로 가져가서 하나님 앞에서 울분이라도 토해줘. 블레셋 앞에서 골리앗이 하나님을 저렇게 모욕하고 있는데 그에 대해 분개하는 다윗이 왜 대학3부에는 보이지가 않니. 난 그게 너무나도 속이 상해.

결국 이 땅의 지도를 가진건 우리야. 교회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세상은 더 흉흉해질거야. 이번 기회에서는 우리가 아무말도 못하겠지만 다음에 더한 기회가 찾아올거야. 다만 더 큰 울부짖음과 더 큰 고통 가운데에서 찾아오겠지. 이 땅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교회를 다시 교회되게 만들어야 해.

우리 함께 울자. 함께 소리지르고 함께 재를 뒤짚어쓰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지금 보는 사무엘상을 더 열심히 보자. 교회에서 시키는 것 하는데에 안주하지 말고 말씀을 븥들고 이 현실에 대해 질문하며 씨름하자. 그렇게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우리를 통해 이 땅을 회복시키실거야.

우리는 2013년에 회개할 기회를 얻었었어. 하지만 우린 너무 게을렀고 그 게으름이 낳은 무식삼이 2016년 지금 기도외엔 할 수 있는게 없는 풍성한 무식함을 낳았지.
 기회는 다시 왔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고, 그리스도인의 명예를 다시 추구할 수 있고 신앙의 유산을 다시 쌓을 수 있어. 교회의 개혁을 다시 부르짖을 수 있어. 
 하지만 이번에도 게으르게 상황을 넘기고, 적당히 현실을 덮는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치뤄야 할 대가는 너무나도 클거야. 4천명의 죽음 앞에서 회개하기보다 여호와의 궤를 가져와서 문제를 덮으려 했단 삼상 4장의 장로들을 기억하지? 4천명에서 멈출 수 있었던 피해가 3만명과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는 수치로 확대되는 비극이 우리 안에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 우리 교회는 충분히 수치 가운데에 있는거 같아.

울분에 써내려간 글이라 썼던 글 중에 가장 기네. 감정을 정제해서 논리적으로 써내지 못해 미안해. 어쩌면 이 글에 책임을 지고 섬김을 내려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 아니면 절대 너희에게 이 마음을 전할 수 없을거 같아서 이렇게 적었어. 지난 2년간, 어쩌면 7년간, 이 공동체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인거 같아.(격정에 써내려가느라 어투가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형 누나들.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

얘들아. 난 누가 뭐라 그래도 대학3부가 이 시대의 대안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 나에겐 확신이 있어. 그리고 그 확신은 2년의 섬김에도 쇠하여지지 않고 더 선명해진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게 꽤나 선명하게 이 공동체를 향한 꿈이 있으시다고 말씀해주셨거든. 그렇게도 교회를 혐오하고 욕하던 좌파성도를 이 교육간사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으로 초대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거든. 부디 우리가, 그 부르심을 회개와 개혁으로 잘 감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 얘들아.

2016년 11월 11일.
너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못난 교육간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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